Yohan Hàn
<공명동작: 피부 안과 밖으로 대화하며>
글/ 김솔지
2019
깊은 곳, 피부
요한한 작가의 개인전 <공명 동작 (Inside Resonance)>이 열리는 갤러리 조선은 지하에 있다. 우리는 깊게 들어간다. 그렇지만 어디서부터 깊어지는 것일까? 표면에서 안쪽으로 들어갈수록 깊어진다고 할때 ‘표면’은 늘 깊어지는 곳 이기에, 어쩌면 가장 깊은 곳일수 있다. 요한한은 갤러리의 지하 공간을 보고 외팔리노스의 터널을 떠올렸다. 실제로는 기원전 6세기의 엔지니어 외팔리노스가 뚫은 그리스의 터널이지만, 여기서 ‘외팔리노스’는 프랑스 문학가 폴 발레리의 『외팔리노스 또는 건축가』 를 뜻한다. 플라톤의 대화를 빌린 폴 발레리는 죽은 자들이 대화하는 형식으로 소설을 쓰며 작품의 ‘의미’를 사람들 사이의 소통 과정을 통해 전달하고자 했다. ‘깊은 곳’, ‘대화’, 여기서 요한한은 폴 발레리의 다음 문장도 떠올린다. “인간에게 가장 깊은 곳은 피 부다(Ce qu'il y a de plus profond en l'homme, c'est la peau).” 깊은 것은 내면이고 피부는 겉면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사람이 세상과 소통을 하고 알아가는 것은 피부를 통해 이루어진다 는 말일 것이다. 전시 <공명 동작 (Inside Resonance)>에서 사람과 사물은 깊은 곳에서 서로의 피부로 마주한다.
두드림, 파동
<Long Gibbous>(2019)는 동물의 외피를 작품의 재료로 사용한 작품이다. 요한한은 구입한 소, 양의 가죽을 불리고 부드럽게 늘려 만들어 놓은 나무 몸체에 여러 개의 장석을 불규칙하게 박아 고정하였다. 보름달 보다는 덜 차고, 반달 보다는 더 간 달, 철월을 의미하는 ‘gibbous’에 ‘long’을 붙여 명명한 이 시리즈에서 작가는 장인처럼 직접 만든 다양한 형태의 북을 보여준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북 양쪽에 가죽을 대는 것과는 달리, <Long Gibbous>에는 한 쪽 마구리에만 가죽이 씌워져있다. 요한한의 이전 작품인 <108th(유령빛깔)>(2012~2015)이 떠오른다. 국경에서 방치된 채 사라져가던 사람들을 눈(雪)으로 (이후에는 합성수지) 새긴 조각이다. 눈밭에 온 몸을 잔뜩 웅크린 (죽은) 사람의 등처럼, 불록하게 튀어나온 북의 반대편에는 북의 등, 배면(背面)이 하얀 벽과 붙어 있다. 이윽고 북소리가 들린다. 작가는 <Long Gibbous>를 전시하는데 그치지 않고, 제작 도구들(지압기, 동물뼈, 옥괄사 등)로 작품-북의 표면을 직접 두드린다. “둥 둥 둥 둥” (죽은 동물의) 피부로부터 시작된 진동이 갤러리 공간을 채운다. 녹음된 북소리의 파 장이 공기를 타고 와 고막을 진동시킨다.
전쟁을 알리던 북소리는 먼 과거의 소통 수단이었다. 북을 두드리던 손처럼, 표면을 두드리고 그 신호가 퍼져 상대에 닿는 소통의 과정은 현재 일상에서는 더더욱 자연스럽다. 손끝이 스마트폰의 단단한 유리면을 두드리면 소통이 시작된다. 전시공간을 작품이 걸리는 공간으로만 이용하기보다, 줄곧 공간 자체를 작품이 펼쳐지는 배경으로 연출하는 요한한은 갤러리조선을 보고 외팔리노스의 터널을 떠올리며 공간의 물리적 특성을 활용한 퍼포먼스를 구상하였다. 추락, 균형, 죽음, 반복, 순환이라는 키워드로 나뉜 다섯 씬과 각각의 휴지기를 갖는 퍼포먼스가 전시장에서 진행된다. 공명동작. 첫 씬에서 퍼포머들은 갤러리조선의 지상 문으로부터 아래로, 아래로 서서히 몸으로 추락하며 손으로 대화한다. 각자의 손에는 스마트폰이 있고, 그들은 틈틈이 문자 소통을 시도한다. 보이는 움직임과 보이지 않는 전자신호가 쉴 새 없이 갤러리 내부를 이동하며 서로를 연결한다. 작가와 퍼포머, 관객 사이에 여러 경로의 소통이 동시에 진행된다.
피부 너머
작가의 생각이 퍼포머의 동작으로, 그 동작이 다른 퍼포머의 언어로, 그 언어가 또 다른 퍼포머의 다음 동작으로 연결된다. 관객도 씬의 주제에 따라 오픈채팅방에 메시지를 보내며 퍼포머에게 동작을 요청한다. 언어로, 비언어적 동작을 불러내는 것이다. 그 요청은 피부 진동으로 또 는 귓속 고막의 떨림으로 우리에게 지각된다. 피부를 경계로 안과 밖에서 소통이 이루어진다. 소통 정보를 피부 밖에서 흡수해 안으로 발산한다. 반대로, 나의 깊은 곳으로부터 피부를 통해 바깥으로 보낸다. 누구나 다분히 자의적이고 주관적인 소통을 할 수밖에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의 말은 ‘나’의 마음을 진동시킨다. 어떤 두드림이 떨려와 ‘나’의 뇌리에 꽂힌다. 각자는 주관적인 개인임에도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것이 있어, 우리는 때로 나누고 공통적으로 감각한다. 서로를 두드릴 힘, 그 두드림에 영향받을 여지가 있다면, 우리는 종종 발생하는 어떠한 오류에도 거뜬히 대화할 수 있는 사이로 지낼 수 있다. 이 터널을 빠져나갈 때 쯤, 우리의 ‘소통 방법’의 변화와 ‘소통 대상’의 선별이 지금의 삶을 영위하는데 어떠한 영항을 미치고 있는지 생각해볼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