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 과 소리의 서로느낌 혹은 달의 미디어>, 2019

김남수(안무비평)

#1. “달이 옆으로 조금씩 움직이듯/ 정교한 말의 장치가 조금씩 풀리고 있다” (송찬호, 시 ‘달빛은 무엇이든 구부려 만든다’ 중에서)
#2. “여성이 권력의 원천으로 삼던 신성한 물건들 — 주로 악기 —을 남성이 독점하게 될 때까지 여성에 의한 남성의 지배, 즉 모권제가 지속되었다.” (레비 스트로스, <여성과 사회적 기원> 중에서)

갤러리 조선의 문이 열리고 군체의 사람들이 계단을 기고 구르기 시작한다. 계단은 지하로 내려가며 가파르다. 기고 구르는 몸들의 속도는 어디선가 단속적으로 들려오는 북소리의 박자를 느슨하게 따른다. 달팽이처럼 매우 느리지만 계단과의 마찰은 저 아래의 세계로 내려가는 몰락의 기분을 자극한다. 니체가 말한 “몰락하라, 적극적으로!”는 삶의 저 바닥, 밑변 아래의 문을 열고 다시 내려가는 집단의식의 진화와 만난다. 만나는 과정은 체내에서 음악을 도출하는 식의 리듬이 있다. 그런데 이 모든 과정은 실시간 SNS 단톡방의 끊임없는 대화와 피드백에 의해 이루어진다. 일종의 현대적 초연결 상태에서의 자기지시이자 자율적인 타입인데, 휴대폰의 작은 창을 일제히 들여다보면서 마치 집 안으로 은근슬쩍 기어들어오는 업신으로서의 구렁이 같은 군체의 퍼포먼스를 한다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니다.
요한한 작가가 연출하고 실시간 지휘한 퍼포먼스 <공명 동작 (Inside Resonance)>은 두가지 감각의 버무림이 있다. 하나는 초연결의 현기증이다. SNS의 작은 창에서 실시간 나오는 정보적 흐름, 급류가 퍼포머와 디렉터 사이에서뿐만 아니라 참여한 관람객들까지 물들인다. 어쩌면 현대적 삶의 풍자이자 활용인 동시에 비판이기도 하다. 그러면서도 미디어가 본래 미디엄, 즉 매체성의 기원에서 생각해야 하는 문제인 것처럼 사람과 사람 사이의 신호 체계를 다시 성찰하게 한다. 또 하나는 그러한 현기증 가운데에서 맑은 샘물처럼 흥건하게 터져나오는 춤의 영역이다. ‘공명’이라고 표현한 작가의 의도는 분명히 춤추는 퍼포머들의 또다른 연결성 — SNS라는 문명적 이기의 초연결과 다른 자연적 초연결 —을 가능하게 하는 ‘감응’ 혹은 ‘감흥’의 서로느낌 부분이다. 
‘꿈과 깨어나기’를 동시화 하고자 했던 철학자 벤야민처럼 묘하게 뒤틀린 결합술로서 이 현대적 현기증의 초연결과 여전히 가능성의 중심으로서 몸들의 서로느끼는 초연결을 함께 묶어내는 작업은 작가가 생각하는 만큼 지루하지 않았고, 그 ‘감응’ 혹은 ‘감흥’의 강도 역시 군체이자 초유기체로서 사람들을 하나의 생명단위로 충분히 구부려서 움직이게 하려는 매개로 보였다. 그러면서도 요한한 작가는 이 구부림의 매개 행위로서 ‘공명’-- 즉 ‘감응’[correspondence]이자 ‘감흥’[affect] -- 이 자기신명으로 바뀌는 안무는 지양하고 있었다. 그는 지루함의 각성 상태로부터 ‘감응’ 혹은 ‘감흥’의 접화된 세계를 열고자 하지만, 그것이 전근대적인 방식의 신명이나 안무적 엑스터시로 진입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그는 이러한 퍼포먼스의 여흥적 흔적, 정서적 아카이브를 중시하지만, 그렇다고 그 여흥이나 정서가 조형적 상태의 작업을 밀치기를 원하는 것은 아니다. 여기에 묘한 길항과 긴장감이 있는데, 아슬아슬하게 기우뚱거리며 균형을 잡으려고 한다고 할까. 시적인 표현이 허락된다면, 그러면서 슬쩍 달의 얼굴을 나타나게 한다고 할까. 그 얼굴성에 의해 다른 시공간이 열린다고 할까. 어떻게?

#3. “야밤에 눈을 감고 조용히 대지의 끝을 보면 자신이 앉아 있는 대지가 떠서 동쪽이 서쪽이고 서쪽이 동쪽이 되어 마침내 동서의 구별이 없어진다.” (박제상, <부도지> 중에서)

하늘의 달을 보면서 해안가를 걸었던 1만년 전의 사람들은 신비를 겪었다. 달의 옆얼굴이 변하는 가운데 바다의 높이와 파도의 세기가 달라지기 때문이었다. 빅히스토리언 신시아 브라운에 따르면, 이 달의 변화와 바다의 변화가 함수관계로 묶이면서 신이 탄생했다고 한다. 보이지 않는 힘에 의하여 밀물과 썰물이 발생하고 갯벌이 홍해처럼 갈라지는 것, 이것이 달신의 권능이었다. 또한 여성 신체가 가진 액체적 변화상 역시 이에 동조하여 달신은 모계사회의 지고신이었고, 이는 악기의 형태와 그 연주로 표현되었다고 한다.
전시장에 설치된 7개의 북[drum] 작품은 이러한 달-바다-여성 신화를 함축한 듯한, 그리고 그 함축된 사연을 들려주는 달의 말이 흘러나오기 직전의 상태를 조형하고 있다고 본다. 요한한 작가는 직접 무두질을 배워서 큰 북을 만들고, 그 울림통을 가진 소리의 잠재성을 기획했다고 한다. 즉 전시장의 북들은 저마다 둥 둥 울리는 소리가 가동될 수 있고, 이는 관객성, 관객의 참여 의지 여부에 달린 문제이다. 실제로 <공명 동작> 퍼포먼스에 둥 둥 울리는 북소리는 이 전시장 벽에 전시된 북으로부터 울려나오는 연관관계 하에서 의미심장하다. 
실시간 유비쿼터스 상태로서 SNS 접속이 자신이 처한 몸의 장소를 상실하게 하여 가속화된 뜬 상태 혹은 이동 상태로서의 비장소를 촉발하게 하는데, 여기가 동쪽인지 서쪽인지 순간적으로 착란된다. 거기에 북소리는 달의 “정교한 말의 장치가 풀리”면서 마치 저기 저 서아프리카의 모시족이 장음과 단음, 이 두가지 장단만으로 모스부호처럼 부족의 역사를 써내려가는 ‘말하는 북’ 퍼포먼스를 하는 것과 유사하게 둥 둥 울리고 있는 것이다. 마치 새로운 연결의 감흥을 그 상실감 속으로 스며들어 메우겠다는 듯이. 여기서 바이너리 코드는 둥 둥 울리는 소리와 그 사이의 침묵이다. 이처럼 북들의 침묵이 뒷받침된 소리는 달빛과 모종의 공감각적 변환 관계에 있다.
이전에 요한한 작가는 마지막 수명을 다하는 그 점멸의 치열한 단계에서 깜빡깜빡하는 형광등 불빛을 마치 북소리 박자처럼 사용하여 안무한 바, 이 빛이 소리로 감각적 번안이 이루어지는 것은 달이라는 사물에서는 너무나 당연한 현상이기도 하다. 물론 형광등 역시 마지막에는 소리를 발생시키지만, 작가의 말로는 깜빡거리는 불빛 자체를 소리처럼 박자 감각으로 퍼포머들이 받아들였다는 것이다. 즉 몸이라는 메타미디어가 이러한 빛의 리듬과 소리의 호환을 진행한 셈이다.
이번에는 소리가 빛을 유출하고 번안하는 형태로서 북이 설치되었다고 볼 수 있는데, 이 북은 달처럼 어느 순간 길게 변한 외양으로 나타난다. 이 ‘나타남’이라는 현시적 사건은 이 설치에서 굉장히 중요한 포인트로 보이는데, 왜냐하면 이 북의 디자인은 두 개의 곡선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하나의 곡선은 본래 달이 가진 윤곽선의 잔여로서 거의 원형에 가깝다. 또 하나의 곡선은 달이 상현이나 하현으로 기울거나 부풀 때 그 몸체 내부에 그림자가 드리워지면서 자기기원적인 언급처럼 혹은 달 스스로도 알지 못했던 비의처럼 드러나는 곡선이다. 이 곡선은 달의 몸체 위로 달의 그림자가 기울기를 타고 스르르 드리워지는 형식으로 ‘나타남’의 사건이 된다. 북소리는 이 ‘나타남’을 말하려고 하는 것이다.

#4. “(...)부분적으로는 우리의 번영을 걱정하는 이상화된 모습을 한 이성적인 천사에 필적하기도 하고, 부분적으로는 큰 머리를 가진 난쟁이 모습을 한 과도한 지능을 지닌 존재, 때로는 악령과도 같이 머리카락에 뒤덮이고 긴 손톱을 지닌 철갑으로 무장한 곤충 같은 모양의 난쟁이 괴물에 해당한다.” (칼 융, <현대의 신화> 중에서)

여성적 권력의 원천이 되는 악기로서 북은 그 소리의 음색을 통해 나타나는데, 요한한 작가는 그 ‘나타남’의 사건을 조형적으로 음색화한다. 즉 북들은 다채로운 외양으로서 마치 장미여관 드나드는 여인의 긴 손톱 같기도 하고, 누군가의 머리를 내리칠 기세의 반월도 같기도 하다. 자기 몸체의 어느 부분을 가로지르는 그림자는 기이한 곡선을 내보이고, 동시에 몽환처럼 낯설게 어필한다. 어쩌면 그 기이한 곡선을 수많은 곡선들, 달의 몸체를 가로지르는 자체 그림자의 선들이 응축되어 있는 곡선, 즉 포락선[envelope, 包絡線]일지 모른다. 무한히 많은 곡선들을 포괄하여 하나의 곡선이라는 사건으로 결정화된 형태. 한 순간의 솟구치는 수직적 시간성을 응결시킨 것처럼 날카로운 형태. 그 수직적 시간성이야말로 변화하는 달의 주기가 가진 시간적 에센스가 아닌가. 곧 달이 삐걱거리며 회전할 때마다 옆얼굴이 달라지듯이 이 곡선은 그때마다 에센스가 변형되는 것이 예정되어 있는 셈이다. 
이처럼 미세하게 달라지는 궤도 속에서 달의 주기에 주목한 요한한 작가는 소리와 빛 사이를 가로지르는 감각들의 아우성을 설치 작업이라는 사물화의 기획에서 풍기는 침묵으로 담아낸다. 그리고 퍼포먼스의 안무를 통해서 다시 그 소리와 침묵이 바이너리 코드가 되어 달의 말을 읊조리듯 터져나오는 것이다. 흐느적거리며 춤추는 퍼포머들의 초연결 능력, 춤의 감흥을 통한 인간 군체의 생명단위 서로느낌은 이처럼 달 코드의 굉장히 흥미로운 감각적 교차 작업 속에서 일어난다. 지금과 같은 21세기, 이처럼 신화적이면서 감성적인 방식의 예술이 가능하다는 것은 불가해한 것 같지만, 실은 극에 달한 테크놀로지의 자기한계가 요청하는 대목이기도 하다.
요한한 작가의 <공명 동작>은 이처럼 보이지 않는 신체적 음악의 관계, 혹은 비매개적인 방식의 소통 관계로 연결되었던 고대적인 커뮤니케이션 능력을 기반으로 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그것은 달빛이자 춤이다. 빛이 광파이듯 춤이라는 파동이다. 이 파동은 사람들에 의해 체현되어 거꾸로 달의 얼굴을 바꾸는 쌍방향 커뮤니케이션의 매개이기도 했다. 비록 그 구현 자체는 현대적인 미디어를 활용했지만, 이는 미디어아티스트 백남준의 경우도 비슷하게 나타나 해학적이었다. 즉 <달은 가장 오래된 TV다>는 텔레비전 내부회로 조작을 통해 달의 권능을 보여주려는, 마찬가지로 고대와 현대를 묶는 벤야민 스타일의 프로젝트였다. 사람들 사이를 주재하는 그 텔레비전 미디어의 감각으로는 한자 밝을 명[明]을 검토하게 한다. 갑골문에서 이 한자는 창문 田과 달 月의 결합이어서 “창문으로 들어오는 달빛”으로 새기지만, 이때의 창문은 예술의 프레이밍 효과로 대체할 수 있다. 그 프레임으로 작가는 북을 선택했다. 그럼으로써 소리와 빛의 호환은 북이라는 프레임 속에서 이루어진다.
중요한 것은 밤이 아니더라도 ‘달빛’이 어디선가 비춰오듯이 감응 혹은 감흥에 젖어들 수 있다는 점이다. 이번 전시의 모티브가 달과 달빛인 것은 허언이 아니다. 실제로 대낮에 ‘달빛’에 물들고 마치 “밤은 참 많기도 하여라”(시인 이상) 라는 밤기운[夜氣]에 젖듯이 관객들이 퍼포먼스에 참여하게 된 것이다. 현대의 일상적 연결 매체로서 SNS가 이 물들고 젖는 달빛과 밤기운의 권능을 대신하는데, 샤머니즘이라기보다 애니미즘에 가깝다. 애니미즘은 사람과 사람 사이에 새로운 기운이 생명체처럼 기동한다는 것이다. 또한 이 대신의 감각은 몸 쓰는 맛을 누리고 그 맛을 관람객들과 나누는 시간이 있기에 성립한다. 이 맛의 제조와 나눔, 요한한 작가의 설치가 갖는 가장 큰 매력이자 특장이다.